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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이것은 예수님의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이 사람들의 갈급함, 배고픔, 곤고함, 찾아다니는 이 심령을 채워 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어디로부터 떡을 사야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사람들이 배고파하지 않고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여기서 빌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합니다.’ 한사람이 한 입씩만 먹어도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은 돈으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일단 빌립의 관심은 돈으로 계산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안드레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이 말을 다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여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 필요의 해답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곧 이어 말하기를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아이가 가진 것으로는 도저히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아무것도 없는 그 상황에서는 그것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가진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비록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그것이 근원적인 생명의 공급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해결책은 돈이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그들의 원대로 주셨습니다. 그럴 때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개입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사역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오병이어 표적을 통해 보여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야 말로 생명의 떡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만나를 먹였지만 그것은 잠시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은 영원한 생명을 공급합니다. 만나는 그날 거두지 못하면 썩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영원히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는 것입니다. 만나는 일시적으로 육체를 유지시켜 주시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공급해 주십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신 떡을 먹어야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입니다.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56절에 말하는 대로 생명이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참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음으로 인해 마지막 날에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 앞에 나아올 때 물질적인 것으로만 나와서는 안 됩니다. 떡을 먹고 배부른 사람들처럼 잠시는 배부를 수 있지만 또다시 배가 고파 몸부림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떡을 따르다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먹고 마시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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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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