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시작해서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이 사건을 통해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입은 사건이기도 하다.
나귀는 보잘 것 없는 짐승이다.
나귀는 당시 일반 사람들이 타고 일을 보거나 혹은 먼 거리로 여행을 가거나 혹은 짐을 옳기거나 수레를 끌면서 사용되던 동물이다. 힘센 수컷 나귀는 많은 짐을 옮기고 일을 잘 할 수 있다. 또한 어미 나귀는 새끼를 낳거나 짐을 옮기고 사람을 태우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더 많은 가격에 팔려갈 수도 있고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어린 나귀는 그렇지 못하다.
오늘 본문에 소개한 나귀는 새끼 나귀에, 사람들이 한번도 타보지 못한 나귀였다. 그러니 큰 짐도 져본 적도 없고, 사람을 태우고 멀리 가본적도 없이 그냥 어미 나귀 주변에서 뛰어놀며 젖을 먹던 어린 나귀였을 것이다. 당연히 가격을 높게 받고 팔지도 못하고, 살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보잘 것 없는 나귀도 어떤 사람이 어떤 용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람이 타느냐?
나귀는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 백성들이 즐겨 탓던 짐승이다. 특히 어린 나귀는 노인이나, 어린 아이들이 타고 다니던 짐승이다. 그러나 이제 어린 나귀는 만왕의 왕, 온 우주를 다스리는 왕을 태운 왕의 짐승이 되었다. 그냥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을 태워도 영광이다. 그런데 이 나귀는 그런 사람들과 차원이 다른 분을 등에 태운 것이다.
어떤 용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비록 어린 나귀였지만 농사도, 무거운 짐도, 사람도 태우지 않고, 가격도 많이 받을 수 없는 나귀였지만 만왕의 왕인 예수님을 등에 타우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했다. 스가랴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된 예언된 나귀인 것이다. 예언된 나귀일 뿐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나귀, 만왕의 왕이 타신 나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예언을 성취할 나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도운 나귀인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 삶의 등에 누구를 태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누가 나를 택했는지, 누가 나를 쓰시겠다 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예수님이 나를 부르셨다. 나를 그의 제자, 그의 자녀, 예언을 성취할 자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위해 일군으로 삼으신다고 했다. 지금 주님은 “내가 너를 쓰겠다”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대답은 어떤 것인가?
만화영화처럼 상상해보기.
후에 나귀는 사람들이 찬양하고 영광 돌린 것이 예수님이 아닌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등에 탔는지 잊고, 마치 자신에 찬양하고, 자신을 왕이라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뒷짐을 지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찬양하라고 다그치며 그렇지 않을 때 비난하고 욕을 한다. 평상시 먹었던 여물도 먹지 않고 맛있는 과일과 체소만 먹으려 한다.
이런 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다. 적어도 어린 나귀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런 만화 영화같은 일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들로부터 벌어지고 있다. 다른 피조물들은 그런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않지만 유독 사람들만이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 쓰임받아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좋아해 주고, 박수를 쳐 주었는데 그것을 자신이 노력이나 힘으로 한것처럼 생각을 하여 칭찬과 영광을 받으려 한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절실하고도 철저히 점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