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역사는 여전히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의 방식입니다. 또 하나는 믿음의 방식입니다.

이성의 방식은 우리의 이성이 경험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분석하는 대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바벨론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바벨론의 입장에서 전 세계는 자신들이 마음껏 정복하고 주무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그들 안에는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못하시는 모습들이 저절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본문에서는 ‘화있을진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가지고 있는 화를 당하게 될 만한 연약한 모습은 무엇입니까? 교만, 탐심, 불의, 분노, 우상입니다.

첫 번째는 교만입니다. 교만의 의미는 부풀거나 치켜 올리는 것입니다.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함을 말합니다.

두 번째로 탐욕입니다. 탐욕은 마땅히 자신이 가져야 할 것 이상의 것에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를 넘보며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나,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세 번째로는 불의입니다.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합니다. 성과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로 노역하게 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한 악행입니다.

네 번째로 분노입니다. 15절에 보면 분노하여 남에게 고통을 주는 나라에 재앙이 닥친다! 이것은 이웃의 타락과 멸망을 조장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하여 심판을 선언한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우상입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우상은 새겨 만든 것으로 거짓말을 가르칠 뿐입니다. 우상은 말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상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이성의 방식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의 지식과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것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겠다는 방식입니다.

또 다른 삶의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라는 말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 믿음이 행동하게 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에 그 행동을 하게 하는 이유, 근거,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이 바로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가 교만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탐욕을 가지지 않으며 불의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으며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중간 중간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합 2:14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합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의인들이 사는 방식이 믿음이라면 그 믿음이 극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이 사는 방식입니다. 교만, 탐심, 불의, 분노, 우상을 극복할 때 믿음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삶이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믿음의 삶을 오늘 내 삶의 현장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믿음, 행동하게 하는 믿음, 행동으로 드러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결국 우리 삶의 최종 종착지를 보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