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의 종교개혁 이후에도 유다의 죄악 된 모습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심판을 예언합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유다의 죄악에 대해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박국은 질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현실을 그냥 바라보고 있기만 하시느냐고 외치고 있습니다. 세상에 왜 악이 번성합니까? 왜 악한 자가 더 잘 됩니까? 그리고 이런 하박국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시는 하나님의 대답이 오늘 본문입니다.

왜 하박국에게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해 안에서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를 어떻게 주관하시는 지를 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3절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그러자 하나님은 5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하나님은 하박국이 사용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말씀하십니다. 두 단어에 사용된 원어는 다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삶 가운데 드러나 보여 주어도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11절에도 보면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공격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자신이 힘이 있어서 자신들의 능력으로 유다를 공격하여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생각이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바벨론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2, 3절에서 하박국은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방법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라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신의 방식으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고 계셨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2절에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침묵하심으로 일하십니다.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침묵이라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또한 5절에서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전혀 예상치 못하는 방법으로 일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실 때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방법과 도구, 예상치 못한 방법과 도구를 사용하여 일하실 때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박국에게 왜 이런 질문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왜 이런 질문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문제를 바라볼 때 우리의 기준과 가치를 가지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문제를 바라보는 성경이 말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6절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이 한 절속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담겨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역사 통치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고 계심을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아픔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