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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응답을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기한을 정하고 기다려도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지 않으시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심히 답답해합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고백은 어떠합니까? 내가 주님 앞에 무엇입니까? 어떤 대답을 하십니까?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가족들은 나사로가 병들어 있을 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와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에서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유하였습니다. 이때 마리아와 마르다가 가진 답답함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 와 달라는 것입니다. 병이 더 깊어지기 전에 와 달라는 것입니다. 치유가 가능할 때 와서 고쳐 주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오신다면 더 좋겠는데 예수님은 오시지 않으십니다. 입으로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병든 나사로 옆에서 오시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답답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상황이 좀 더 달라집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시지 않으시고 굳이 유대로 다시 들어가십니다. 그곳은 예수님을 향하여 돌을 들어 치려던 곳입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은 나사로가 잔다고 말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잔다고 말하면서 걸음을 재촉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곳으로 오십니다. 그러나 이미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마르다는 너무나 안타까워서 소리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지만 마르다는 아직까지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아직도 소망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향하여 말하는 것은 나사로를 위하여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간구가 아니라 선포였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응답이기에, 내가 기대하지 않던 응답이기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는 그렇게 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사로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응답을 주셨지만 그 응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또 다른 상황이 전개됩니다. 38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런 다음 하시는 말씀이 “돌을 옮겨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때 마르다가 이야기합니다. 아마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 속에서 이미 포기와 어쩌면 예수님을 향한 힐난의 소리를 퍼 부었는지도 모릅니다. 완전히 포기상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신 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옮겨 놓습니다. 기도하십니다. 그리고는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십니다. 나사로가 나오자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문제를 통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응답으로 인도하시지만 나의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을 나의 것으로 누리지 못합니다. 응답이 늦다고 느낄 때 내 시간표를 내려놓고 주님을 바라봅시다.

선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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