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변화의 삶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그들의 삶에 성장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참된 변화는 구체적인 삶의 행동에서 나타납니다. 생각이 변했으면 그 뒤를 이어 반드시 행동이 변해야 합니다.
9장38절에 보면 견고한 언약을 세워 인봉하였습니다. 역사 속에서 실패한 경험들을 되짚어 보면서 이제는 그런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언약을 세웁니다. 그런 다음 본문에 그 서약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단지 유대인이기 때문에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겠다고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끌고 가서 맞추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30절에 보면 유대인들의 새로운 헌신을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무엇을 멈출 것인지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라는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섞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 결혼을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수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31절에서 사람들은 안식일에 어떤 물건도 사거나 팔지 않겠다고 서약을 하며 참여합니다. 그래서 그날을 안식하는 날로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 누리는 것입니다.
32절에서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성전세가 매겨졌으니 성전세를 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의무를 다 했다고 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39절에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단순히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무엇인가로 채워지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계속하여 관리하고 가꿈으로 인해 그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며 하나님과 함께 날마다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욱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진설병을 드리고, 소제와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는 것입니다. 정한 시기에 나무를 바칩니다.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립니다. 맏아들들과 가축의 처음 것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가 드립니다.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에게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에 둡니다.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그것을 받으시고 그것을 통해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는 그 백성들의 마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변화의 삶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변화의 삶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함이 부족한 것을 보게 됩니다. 머리로는 받아들이는데 행동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거기서 멈추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에는 마음의 변화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내가 고집스럽게 바꾸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바뀌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그런 과격한 변화를 절대로 우리 삶에 누릴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과격한 변화를 누려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속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