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보물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기에 연약할 때에나 건강할 때에나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그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를 가장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는 대적은 밖에서 다가오는 대적이 아닙니다. 밖에서 다가오는 대적은 피하거나 대처하여 싸우면서 다음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적은 자기 속에 있는 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동안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성벽을 쌓는 것에 집중하였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비웃습니다. 그들을 무시합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 일이 진척이 되어 가면서 내면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가정을 보기 시작하고 삶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차라리 주변 나라들이 공격할 때는 기도하면서 파수꾼을 세워 대적하여 싸우며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면의 문제들을 내부의 문제들에 부딪치게 되었을 때는 오히려 나약해지고 어찌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2절에는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3절에는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4절에는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양식의 문제, 곡식을 얻을 근원의 문제인 밭과 포도원과 집, 그리고 세금의 문제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힘을 모으지만 자신들의 작은 목표들이 막히게 되었을 때 부르짖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귀족들과 민장들을 향하여 심히 꾸짖으며 불의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9절에 나오는 대로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고통의 소리를 듣고 그 문제를 다룰 때의 기준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행하여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5절에도 보면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총독이 되었는데 자기보다 먼저 했던 총독들의 모습을 보니까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은 사십 세겔을 빼앗고 백성을 압제하였던 것입니다. 자기의 자리와 명예와 부를 위하여 백성을 짓밟고 자기만 챙기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 보면 총독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총독들이 남의 것을 빼앗아서 만든 그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백성들을 고통의 자리로 이끌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선 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다른 어떤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이익이나 개인적 유익을 뛰어 넘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서야 합니다. 또한 통치자들이나 권세자들이나 직분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곳에 놀라운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삶을 해결할 수 있는 원칙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