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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들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유와 다른 위치에서 잃어버린 바 되었지만, 사실은 둘 다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그러기에 둘 다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누구보다 하나님 아버지와 가깝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그들은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길을 잃은 자들입니다. 오늘은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대변하는 형의 삶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형의 삶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길을 잃는다는 것은 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거리가 멀어서 길을 잃고, 거리가 가까워서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형이 어디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습니다. 작은아들을 말할 때는 먼 나라에 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났다고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큰아들은 춤추는 소리를 들을 만큼 거리상으로는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은혜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그 안에, 가족이 함께하는 그 자리에, 아버지가 있는 그 자리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집 가까이 왔음에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아들이 비록 거리로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여전히 길을 잃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적 상실은 하나님과의 거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와의 거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분리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금은 드러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심판 때에 명백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이 아버지와의 친밀함 없이 살아갈 때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분노가 일어납니다. 28절에 보면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분노가 일어났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형은 지금 누구에게 분노하고 있을까요? 물론 동생에게 화가 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아버지에게 화가 난 것 같습니다. 배은망덕한 동생을 받아 줄 뿐 아니라 잔치까지 벌여 준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2절에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수군거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수군거렸다는 것은 불평하였다. 원망하였다는 말입니다. 누구에게 원망하고 있습니까? 세리와 죄인들을 미워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불평은 예수님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이 가진 또 다른 어려움은 자기 정당성입니다. 형은 아버지를 향하여 뭐라고 말합니까?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겼다.’고 말합니다. ‘명을 어김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얼마나 충성되이 섬겼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잔치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그런 잔치를 받을 수 없느냐고 자기 정당성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형의 또 다른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질투입니다. 형의 마음은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질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집을 나간 적이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돈을 창녀들에게 준 적이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명령을 다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러지 못한 동생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다니요. 왜 동생에게는 그렇게 하시고 나에게는 염소 새끼라도 잡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형의 외침입니다. 여기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동생에 대한 질투가 가득한 표현입니다.
마지막으로 형은 사실 아버지나 동생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관심은 자기 자신입니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형은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동생의 이름도 부르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동생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용서하지도 않고, 용서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형은 아버지에게도 사실 관심이 없습니다. 동생이 집을 나간 다음 아버지는 어떻게 하며 지냈겠습니까? 식탁에 앉아 근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형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동생을 위한 아버지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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