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첫째 아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 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집에 가까이 왔을 때 풍악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때 이 큰 아들은 집으로 들어가서 확인하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종을 불러 무슨 일인지를 묻습니다.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누리지 않습니다. 종이 말합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그때 큰 아들은 화를 냅니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합니다. 스스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그의 아버지가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큰 아들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유대 사회에서는 아주 패역한 아들의 모습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남으로 아버지를 욕되게 하였다면, 큰 아들은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집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고 아버지로 하여금 밖으로 나오도록 만들면서 아버지를 욕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아들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구원은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질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질서를 새로운 질서로 바꾸어 나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새로운 주인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만든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기가 믿어왔던 질서, 자기가 지켜 왔던 질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분명히 자기가 누려야 할 집, 자기가 권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29절에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항의를 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아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준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항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아들이 하고 있는 대화의 기준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작은 아들을 받아들인 아버지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잔치를 벌이는 이 집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신이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투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의를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길을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만드시고 그 길을 열어가십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것입니다.
큰 아들은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살림을 가져 간 것에 대하여 매우 분노합니다. 그러나 큰 아들이 화를 내는 속내는 무엇일까요? 이미 자기의 몫을 가지고 떠나갔던 동생이 돌아와 다시 아들이 된다는 것은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재산분배가 일어날 것이 틀림없는 상황입니다. 지금 큰 아들은 아마도 그것을 염려하고 있을 것입니다. 내 몫이 줄어들 것 말입니다. ‘나 한테는 염소라도 주어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어떻게 감히 그에게는 송아지를 주십니까?’ 사실 이 비유를 들어야 하는 대상은 1절과 2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대접을 받고 누려야 하는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는 방법만 다른 두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