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내 삶의 주관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삶의 주관자이심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생각과 자기 중심의 삶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헤롯 아그립바 앞에서 재판을 받는 중에 변론을 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 그 눈을 뜨기 전에는 자신이 만든 빛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삶의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빌립보서 3:4-5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출신을 소개합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입니다. 베냐민의 지파입니다. 히브리인이고 바리새인입니다. 부모가 유대인이었고 당시 필요한 언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원래 바울은 갈릴리 출신입니다. 그러나 헤롯이 죽으면서 혼란한 정국속에서 터키의 다소로 이동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의 부모는 로마의 시민권을 획득하고 로마 시민으로 살게됩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이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리새인으로 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매우 엄격한 법을 지켰습니다. 가말리엘로부터 학문을 배웁니다. 갈라디아서 1:14에 따르면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매우 철저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쳤던 것 같습니다.
예수은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많아지자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대중운동의 경쟁자로 보았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율법을 극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율법에 매여 있던 바리새인들로서는 예수님을 수용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고대했던 메시아는 예수님과 같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바울의 믿음에 따르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대제사장들의 명령을 받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둘러비추게 됩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여해 주시는 사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사명에서 예수님이 부여해 주시는 사명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사명은 다름이 아니라 바울이 빛으로 말미암아 눈이 떠 진 것처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가서 그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럴 때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예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빛이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빛으로 새로운 눈을 뜨고 살아가게 됩니다. 눈을 뜨게 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빛으로 말미암아 눈을 다시 뜨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빛의 삶, 하나님을 집중하는 삶, 거룩하게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졌던 자신의 믿음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었던 것이었는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내려 놓았습니다. 다시 진리를 붙들고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나의 신앙은 어디서 출발합니까? 봉사하는 가치가 무엇입니까? 사역하는 가치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헌신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닌 나의 열심만으로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시 예수님 앞에 먼저 서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과 봉사와 사역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