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아들아!’
오늘 본문의 결론은 다윗의 고통스러운 외침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절규를 하고 있었습니까? 그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 상황을 반드시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이야기의 흐름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에게는 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떤 기회입니까? 문제를 풀어가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관계를 회복해 나가서 미리 이런 어려운 상황을 만들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의 뜻은 평화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화를 위해 수고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감정대로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의 삶을 내 버려두었습니다. 그 결과가 이런 아픔을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본문에 몇 가지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 암시를 주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사실 이 말들은 모두 이루어지지 않은 말들입니다. 27절에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전령이 가지고 오는 소식이 겉으로는 좋은 소식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결코 좋은 소식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28절에 ‘평강하옵소서.’입니다. 현실적으로는 결코 그 평강을 누릴 수 없는 상태입니다. 29절에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라고 묻는 다윗의 마음입니다. 어린 아들을 향한 마음이 있었다면 그 아들을 잘 안내하고 도와주었어야 합니다.
왜 다윗이 이런 절규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까?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다윗과 압살롬의 이야기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이 절규의 시작은 다윗의 아들들 간의 문제에서 일어납니다. 다윗의 첫째 아들인 암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암논이 다말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말은 압살롬의 누이입니다. 암논은 간교한 친구 요나답의 제안대로 아픈척하며 다말에게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방에 들어온 다말을 강제로 동침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암논이 이제는 다말을 미워하기 시작하는데 처음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 강하게 미워하는 것입니다. 다말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 사실을 다 알게 됩니다. 압살롬은 2년을 기다립니다. 압살롬이 양 털을 깎을 때에 다윗의 모든 아들을 다 초청합니다. 암논이 술에 취해 즐거워할 때에 압살롬은 자기의 종들에게 그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암논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도망을 합니다. 압살롬은 그술왕 암미홀의 아들 달매에게로 도망을 가서 3년을 그곳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쯤 되자 왕이 압살롬이 보고 싶어 압살롬을 향한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요압이 압살롬이 돌아 올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데리고 왔으면 맞이해야 하는데 2년 동안 얼굴을 대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 압살롬은 반역을 꾀합니다. 자기 사람들을 모으고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소문을 냅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전략을 세웁니다. 다윗은 광야로 도망을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가 서로 맞붙어 싸우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압살롬은 너그러이 대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투에서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나무 가지에 걸려 매달려 있는 것을 요압이 창으로 죽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미워하고 반목하고 죽이려고 덤비는 것만이 해답이 아닙니다. 참된 해답은 우리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오늘 내가 나를 이기고 도전해야 합니다.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평화를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