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두 아들은 한 여자에게서 난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가 다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여종이 있습니다. 애굽 사람인데 이름이 하갈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내 여종과 함께 잠자리를 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들을 얻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여종 하갈이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는데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자신들이 한 것입니다. 육신을 통하여 아들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문 뒤에 서 있던 사라가 웃습니다. 육체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남자로서 아이를 가질 능력이 없습니다. 사라는 여자로서 아이를 가질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 후에 창세기 21장에 보면 드디어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은 사람의 욕심이나, 사람의 행위로 태어난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이야기를 다 하고 난 다음에 이것은 단순히 이 두 여자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될 세대를 비유로 표현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비유의 적용은 이렇습니다. 여자들은 두 언약입니다. 하나는 시내산 언약이고 하나는 약속언약입니다.

하갈은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입니다.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았다는 말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율법이 조건이 되어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을 수단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곳을 이 땅의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자유를 누리는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낳았습니다.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곧 위에 있는 예루살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떤 자들이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28절에서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자녀가 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29절에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육체로 말미암아 난 자들의 핍박이 있을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이 어릴 때 조롱하였습니다. 오늘날 명목상의 종교인들은 우리의 연약함이나 외적인 것들을 가지고 핍박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분명한 확신이 하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30절에 말하고 있는 대로 여종의 아들은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처럼 유업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믿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갈등이 더 많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우리는 분명한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