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왔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돌이 옮겨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두 제자에게 달려가 말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습니다.’ 두 제자가 무덤에 와 봅니다. 그리고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마리아가 두 천사에게 말합니다. ‘사람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마침내 제자들에게 가서 주님을 만난 것과 주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전체 흐름입니다.
교회는 들어와서 보아야 합니다. 밖에서 겉모습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밖에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발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도 밖에서 보는 것이지만 우리의 마음이 열리지 않는 것도 밖에서 보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무덤에서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마리아로 하여금 두렵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자세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마리아는 결국 예수님을 보고 만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봅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에서 교회의 겉모습만 보면, 스쳐 지나가는 모습만 보면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더 가까이, 더 깊이, 더 집중하여 들어와서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달려 왔습니다. 예수님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워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기뻐하였습니다. 모든 초점이 예수님께 있을 때 교회는 기쁨과 승리를 누리며 담대하게 사명을 감당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흔적을 보아야 합니다. 무덤 안에서 두 제자는 예수님의 머리에 쌌던 수건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세마포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일어나셨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났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무덤에서 나올 때에 그의 온 몸은 천으로 감겨져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풀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은 그곳에 그대로 두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있고, 예수님의 사랑이 있고, 예수님의 능력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구석구석에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예수님이 살아나신 흔적들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 흔적들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붓기 위해 무덤을 방문하였습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거나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누워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그곳에서 교회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교회는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18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고 전합니다. 마리아는 늘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달려가 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만난 주님, 자신이 들었던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교회는 만나는 만남에서 출발하여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자신이 만난 주님을 고백하며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아가 담대하게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는 곳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누리십시오.